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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였던 '엽기수석' 유인태의 눈물

  • 기사입력 2005.12.08 10:39
  • 기자명 이상원
'엽기 수석'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유머을 잃지 않던 유인태 열린우리당 의원이 눈물을 흘렸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관련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 의원은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의 발표가 난 직후인 7일 국회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그분들이 돌아가신 게 1975년 4월 9일인데, 이거 하나를 밝히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며 눈물을 흘렸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유 의원은 "사형집행을 당한 분들의 유족들이 30여 년 동안 고통을 겪었는데, 이제서야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 때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기뻐했다.

유 의원은 이어 "엄청난 고통을 받았을 유족들도 용서와 화해로 한국사회를 따뜻한 사회로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다"며 "이 사건 관련해 재심신청을 했는데, 너무 법률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법원도 과거의 권위적인 틀에서 탈피해서 과거 잘못에 대해 개방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유 의원은 또 "돌아가신 분들과 유족들에 대해 사회가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국가기구로 활동하게 됐는데, 그 이름에도 들어가 있듯이 따뜻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지난 시절의 한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의원은 "규명과정에서 혹시 증거가 불충분하고 이해당사자들에 충분한 소명기회가 없는, 경황에만 근거한 과거사 규명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는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의 논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박근혜) 당대표와 관련이 돼서 그 양반답지 않은 논평을 한 것 같은데, 세상이 다 아는 얘기를 그렇게…. 발표를 하기에 앞서 나름대로 문서검증, 면담, 충분한 조사를 거쳐 발표를 하지 국정원이 제대로 조사도 없이 발표했겠나."

유 의원은 이와 함께 "당시 대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에 사형집행 순서를 밟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대법원 판결은 75년 4월 8일 오후 2시에 있었다. 이에 앞서 물리선생님을 하다가 잡혀온 김용원(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선생을 구치소에서 만났는데 '아무래도 죽일 것 같다'고 해 '그럴 리가 있겠냐'고 했다. 김 선생이 '미제수정(수갑)으로 갈아 끼웠다'고 했다.

사형수들은 수갑을 채우는 데 허술하게 해서 젓가락으로 끓을 수 있는 정도로 하다가 집행할때는 손을 못 움직일 정도의 미제수정을 차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제수정으로 갈아 끼운 것이 오후 1시였고, 오후 2시에 판결이 났다. 이렇게 판결 전에 사형집행을 위한 전 단계에 착수했고, 다음날 새벽 5시부터 집행했다."


유 의원 외에 여권쪽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로는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철 전 의원과 이해찬 총리, 정동영 장관, 장영달·강창일 의원, 이강철·정찬용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이 있다. 김근태 장관은 배후조정혐의로 수배 당했다.

한나라당에는 박계동, 이재웅 의원이 있고, 손학규 경기지사도 민청학련 지도부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됐었다.

유 의원은 마지막으로 "제가 대표 발의한 사형제도가 폐지돼서 이런 억울한 죽음이 이땅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힌 뒤 "그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형제도를) 계속하자"는 농담으로 간담회를 마쳤다.

(제공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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