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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고치는 차 없다. 국내 첫 자동차정비 명장 박병일대표

  • 기사입력 2005.07.09 10:04
  • 기자명 이상원

‘못 고치는 차 고쳐드립니다’ 인천시 남동공단에 자리 잡고 있는 1급 종합정비공장 카123텍(www.car123tec)에 걸려있는 현수막에 쓰여 있는 문구는 이렇다.

 

이 공장의 사장은 박병일(46)씨. 그는 지난해 자동차정비업계에서는 최초로 명장이 된 ‘자동차 정비의 왕’이다. 그는 현수막에 적혀있는 대로 못 고치는 차가 없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는 최고 권위자가 된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중퇴한 후 버스회사에서 정비기술을 배우기 시작해서 32년, 마침내 최고 기술자로 우뚝 섰다. 남동공단중심부에 자리한 3층 건물에 공장과 사무실을 열고 22명의 직원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박 명장은 15개의 자동차 관련 자격증과 20종의 저서 그리고 곧 4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다.


70년대 슬레이트 지붕이 보편화 되던 시절 기와 굽기만 고집하던 아버지 슬하에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가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형편상 일찍이 포기하고 정비공장에 몸을 의탁했다.


어린 눈에도 2만여 가지 자동차 부품들이  해체·조립되는 것이 신기했고, 그래서 더 일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비사의 길은 험난했다. 번듯한 이론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참들한테 물어보면 시원찮은 대답이나 꿀밤이 돌아오기 마련.


새벽 다섯 시나 되어서야 일이 끝나면 낯 12시 출근 때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을 빨리 배워야겠다는 욕심에 청계천에서 헌책을 사서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경기도 교문리에서 서울역 근처에 있는 학원을 오가는 버스에서의 두 세 시간이 꿀처럼 달디 단 휴식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며 2급 자격증을 따고, 23세 때 1급 시험에 합격하자 모두 믿어주지 않았을 정도로 당시로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계속 정진하다보니 자격증이 늘어났어요. 인정받고 싶고 내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 할 겸 공부를 하다 보니 자격증이 열개가 됐는데 이왕이면 ‘한 다스’ 12개가 좋을 것 같아 또 땄지요. 그러다가 지금은 15개가 돼버렸어요.”


“말은 쉽게 하지만 집념과 성실로 일관해온 그의 삶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그는 독학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뿐 아니라, 94년에는 인천기능대학을 졸업하고, 89년부터는 국내 최초로 산업현장 실무자를 대상으로 특강을 해왔다. 교수가 된 것이다. 3개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출강, 강의를 하고 매스컴과 해외에서 그의 출연을 기다리는 정비업계의 스타가 되었다.

 

자동차가 우리네 생활 그 자체가 된지 오래이다. 따라서 자동차에 대한 각종 정보와 기술적인 전문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행되는 차량의 종류만도 130여개, 모델에 따른 기능정보와 정비기술이 필요하다.


박 명장이 다른 이들보다 돋보이는 까닭은 바로 그런 정보와 기술을 남보다 앞서 보고 익히는 혜안을 가졌다는 점이다. 국내에 처음 전자제어엔진이 들어오기 3년 전인 지난 83년부터 그는 이미 영문으로 된 전자이론서를 구해 개인지도를 받아가며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며 핀잔할 때, 그는 막대한 번역료까지 지불해가며 외국기술서적을 탐독했다.


우리나라에 전자회로를 장착한 차가 도입되었을 때 그만이 정비를 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정비기술이 전문적이며 중요하다고 인식하면서도 3D 직종이라는 편견 때문에 꺼릴 때, 박 명장은 남다른 마인드로 이 일에 매달려 일가(一家)를 이루어 자동차정비의 최초 명장이 된 것이다. 그의 명장 선정은 정비사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그들에게 신선한 자극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기술과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10여년 걸려 터득한 기술이라도 후배들이 1,2년 만에 배울 수 있다면 사회에 보탬이 되겠다 싶어 열심히 기술 전수를 한다”는 박병일 명장.


거금을 들여 번역한 자료를 복사하거나 디스켓에 담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주위에서는 기술자를 양산하면 수입에 지장이 있다고 싫어하더란다.


“나만 알고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기술이 사장(死藏)될 수도 있고요.”


우리나라가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면서도 변변한 정비기술이론이 정립 안돼 있는 것이 아쉬워 시작한 다양한 활동이 그를 기술전도사로 만들었다. 틈나는 대로 미국과 독일, 일본 등지에서 연수를 받는 등 외국의 하이테크를 섭렵했다.

 

그의 독서습관은 15살 소년 때 토끼잠을 자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부터 생겨 지금도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 하단다. 시도 때도 없이 기술서적을 탐독해서 ‘가랑비에 옷 젖듯’ 새로운 지식을 쌓고 여기에 현장실무와 이해하기 쉬운 정비사례를 보테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기술을 전수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전국의 자동차 정비업체 약 6만5천중 4만 5천여 업체, 약 20만 명의 자동차정비사들에게 기술을 제공했다. 연구하고 개발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에다 새로운 기술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박 명장은 ‘기술자가 대우받는 세상을 위해서’ 안한 일이 없다.


“처음 전자회로 장착 차가 도입되었을 때 전국에서 강의와 자료요청이 쇄도해 제가 떴지요. 강의료도 다른 사람의 3~4배를 받았고요. 그 돈으로 자동차에 관한 정보 얻으려 외국에 연수가고, 새로운 장비 구입하는 등 교육비로 썼지요. 외국서적 번역비만도 1억5000만원은 들었을 겁니다.”


그가 기술습득을 위해 얼마나 몰두했는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 제 친구는 2천5000만원 들여 땅 사고 5년 후 3 억원을 벌었지만, 저는 그 돈으로 장비를 구입했는데 나중에 2백만 원짜리 중고품이 되더라고요.”라며 껄껄 웃는다.


“부동산 사서 돈이 남았다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지식으로 남아 20만 명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결국 내가 더 부자라고 생각한다.”는 박 명장은 ‘작은 씨앗이 썩어 천배, 만 배의 수확을 거두는’ 밀알론을 편다.


언젠가 외국서 강의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후진국식 교육시키며 자부심 느껴서야 되겠나, 선진국식 교육을 할 수 있는 책을 내야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동차 제작기술은 외국에서 수입했지만, 정비기술은 우리가 외국으로 역수출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쓴 책이 전자제어의 이론과 실무를 집대성한 <전자제어 이론과 실제>4권으로 곧 시리즈로 출판될 예정이다.

 

자동변속기 차량의 급 발진 사고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지난 99년, 소비자 과실이라는 자동차메이커와 매스컴이나 학자들간에 논란이 한창 이었다. 이때 그가 나서서 논란을 종식시켰다.


풍부한 현장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사건을 깨끗이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이 일은 국내는 물론 외국사례에서도 없는 것으로 그에게 또 다른 명성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처음 그가 반증자료를 제출했을 때는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일개 정비사가 내놓은 근거를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이었지요. 만약 제가 교수였거나 연구원이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박 명장은 자동차 다섯 대를 망가뜨려가면서 실험한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기름쟁이’라고 낮춰보는 주변의 편견을 ‘쟁이’의 고집과 신념으로 깨뜨린 이 일은 그에게 특별한 자부심을 심어줬다.


‘며느리도 몰라’라는 말처럼 기술은 절대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어깨너머 전수’식으로 배운 정비기술의 이론과 실제를 책으로 낸 것도 그가 처음 시도한 일이다. ‘정비사례’라는 말도 그가 처음 사용했고 신차의 성능을 테스트하는 ‘정비시승’ 역시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말이다. 그는 또 정비사로서 첫 번째 기능장이 되었고, 명장이 되었다.


“건방진 말이지만 저는 군계일학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고 거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모색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첫 번째도 노력, 두 번째, 세 번째도 노력이라는 그의 말대로 서가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은 가장자리가 헤어져 있다. 재독 삼독하고도 모자라 틈틈이 다시 꺼내보기 때문이다. 보다 높은 경지로의 비상을 준비하는 것이 진정한 기술인의 자세라고 박 명장은 못 박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 물꼬를 터 흐르게 하는 것만이 물을 신선하게 보존 할 수 있듯이 지식이나 기술도 여러 사람에게 나눠줘야 비로소 그 가치가 커지는 것이며 국가적으로도 이롭다는 게 박 명장의 지론이다.


“복지회관, 여성회관, 체육회관은 많은 데 어째서 기능인 회관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일선에서 물러난 기능인들이 자신의 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기능의 사장을 막아야 한다는 것.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술만이 살 길이며 기술의 쇠퇴는 바로 사회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런 차원에서 요즘의 이공계 기피현상은 그동안 기술자 푸대접 풍조가 낳은 하나의 업보로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 충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우려한다.

 

“기능올림픽 14년 연패는 대단한 위업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자랑이지요. 젊은 기능인들이 프로골퍼 보다 사회적으로 더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프로골퍼는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누리지만, 기능올림픽 수상자들은 신문의 한 귀퉁이에 잠깐 비쳤다가 사라져 잊혀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기능인들을 스타로 만들어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면 탤런트 시험에 수천 명 몰려들 듯 이공계 지망자도 늘어날 것이라고.

 

기술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한다는 박 명장은 외아들 대세(19)군에게 정비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도 물론 자동차 관련학과로 진학할 예정이다. 진정한 기술자는 ‘한 손에 책, 다른 손에는 공구’라며 연구하고 탐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른다.


오는 11월 베트남에서 문을 여는 공장일과 새 책 출판, 전북대학교 대학원 출강 그리고 고객이 6천명에 이르는 회사경영으로 바쁜 그는 “아직까지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그는 기술로 버텨온 이 나라가 외국에서 다시 기술을 빌려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기능인우대정책이 탄탄하게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가 가진 기술을 후학들에게 전수해서 그들이 좀더 편안하고 빨리 기술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는 박 명장. 이제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인간명장’이라는 칭호를 받도록 노력하겠다며 밝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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