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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성공 비즈니스] 기업 헌법 제1조 “기술자를 우대하라”

  • 기사입력 2005.07.01 14:05
  • 기자명 변금주


는 운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운은 내가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더 많이 내게 다가옵니다.”

마그나 그룹(Magna International Inc.)의 프랭크 스트로나크(Frank Stronach·72) 회장은 최근 캐나다 국영방송인 C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같이 말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집단의 오너이자 캐나다 재계에서 신화적인 존재인 스트로나크 회장도 50년 전 북미 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수중에 단돈 40달러뿐인 가난한 이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타고난 근면성과 기술, 사업감각, 그리고 그가 언급한 운이 합쳐지면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반 세기 만에 전세계에 종업원 7만5,000여명을 두고 연간 매출액 150억 달러(약 18조원)대의 매출액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의 오너로 변신했다. 50년 전 시간당 1달러 미만의 임금을 받으며 접시를 닦던 오스트리아 출신 이민자 청년은 이제 한 시간에 5,000달러(약 600만원)를 버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것이다.

그가 세우고 발전시킨 마그나 그룹은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포함, 자동차의 거의 모든 주요부품 및 새시, 플라스틱 차체 패널 등 외장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제품의 대부분(71%)을 이른바 북미지역 ‘빅3’ 자동차 메이커, 즉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에 납품하고 폭스바겐, BMW 등 유럽의 자동차 제조업체에도 일부 공급한다. 지난 6월 말 현재 자동차부품제조 관련 7개 계열사와 비제조업 2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북미를 포함, 전세계 22개국에 215개의 공장, 48개 연구소 등을 두고 있다. 마그나 그룹은 한국에도 진출, 지난 2003년 5월 동광기연과 합작으로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 ‘DK인테리어’를 설립했으며 이에 앞서 1997년 한화기계를 인수해 ‘HAC’라는 부품업체도 출범시켰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평생의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95년 ‘캐나다 기업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99년 캐나다 정부가 주는 ‘자랑스런 캐내디언(Order of Canada)’에 선정되고 지난 2000년에는 ‘캐나다 창업가 평생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성공비결은 크게 ▷기술자 우대 정책 ▷창업가 정신 유지 ▷사회 책임론 등으로 요약된다. 맨손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군 그의 ‘도전과 응전’ 정신은 오늘날 국내외의 젊은이들에게 뚜렷한 귀감이 되고 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34년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의 바이츠(Weiz)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이츠는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선출된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낸 그는 14살 때 학교도 그만두고 기술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다. 22살이 되던 54년 조국을 떠난 그는 ‘무작정 상경’하듯이 캐나다에 도착한다. 열두 시간 이상 걸리는 여객선, 그것도 언제 돌아갈지 기약도 없이 편도 승선권만 끊었던 길이었다. 일자리를 찾으러 몬트리올까지 흘러들어간 그에게 떨어진 일은 병원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일이었다. 여유시간이 좀 생기면 골프공을 줍는 아르바이트도 겸해야 했다.

몇 달 뒤 몬트리올에서 토론토로 이사 간 청년 스트로나크는 자그마한 주물공장에 취직한다. 거기서 공구 만드는 실력을 인정받아 동업자 제안도 받지만 그는 나 홀로 창업의 길을 선택한다. 그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자금과 은행대출 1,000달러로 57년 스트로나크는 토론토에 멀티매틱(Multimatic)이라는 자신의 공장을 연다. 돈이 없어 오래된 차고 한 편에 중고 선반기계를 들여놓고 그는 열심히 공구를 만들어낸다. 잠은 공장 구석에 마련해 놓은 간이침대에서 자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그는 차근차근 사업을 키워나간다. 처음에는 혼자서 시작했던 공장이 연말에는 종업원 10명의 소기업으로 발전한다.

스트로나크는 이때 자신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공구 제조업이 아니라 자동차부품업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 스트로나크 회장은 40여년 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노사 갈등과 생산성 향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자동차 산업은 자체제작에서 점차 탈피해 납품받은 부품을 조립하는 단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다행히 이 예상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자동차 부품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뒤 1년여 만에 그는 굴지의 자동차메이커 제너럴 모터스(GM)로부터 드디어 첫 계약을 따낸다. 자동차 햇빛가리개에 쓰이는 경첩 30만개가 최초의 주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숙련공 하나가 회사를 떠나겠다고 나섰다. GM의 주문을 감당하려면 이 기술자가 꼭 필요한데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눈앞이 캄캄했다. 스트로나크는 이 기술자에게 수입의 일정부분을 성과급으로 줄 것을 약속하고 붙들 수 있었다. 당시 이 기술자에게 제안한 성과급은 수입의 3분의1이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기본급만 지급하고 초과근무 수당은 없애는 대신 세전 수익의 일정 부분을 지급할 것을 미리 약속한 이 아이디어는 뒷날 마그나의 ‘기업 헌법’에 반영돼 마그나 그룹 노사 안정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기술자 지위 강화… 노사안정 기반

스트로나크 회장은 이때 ‘기술자 우선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계속 이 원칙을 밀고 나간다. 그는 이와 관련, 2003년 토론토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에서 “기술자의 지위를 강화시켜 각 작업장을 독립적인 이익창출의 중심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뒀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원칙 덕분에 회사의 규모와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57년 설립 당시 1만3,000달러(이하 캐나다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10여년 뒤인 69년에 1,000만 달러, 20여년 뒤인 79년엔 1억5,000만 달러를 기록한다. 설립 29년 만인 86년 드디어 10억 달러를 돌파한 마그나 그룹의 매출액은 증가에 가속도가 붙어 이후 20억 달러를 달성하는 데는 불과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운도 따랐다. 65년 캐나다와 미국 정부가 자동차 협약(Auto Pact)을 맺으면서 캐나다의 관련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양국이 맺은 이 협약에 따라 부품산업의 관세가 면제되면서 캐나다에서 생산된 자동차 제품이 미국에서 생산된 것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90년대 세계무역기구(WTO)가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효력을 발휘했던 이 협약은 스트로나크 성공의 또 다른 기둥이 됐다.

이런 주변 상황의 호전에 힘입어 그의 회사도 확장일로를 걸었다. 드디어 60년대 그의 회사는 상장회사인 마그나 전기(Magna Electronics)와 합병한다. 이때 비로소 ‘마그나’라는 회사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물론 그의 기업철학이 담긴 ‘공정한 기업(Fair Enterprise)’정신이 태동한다.

70년대 스트로나크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다. 70년대 10년 동안 공장은 40개로 늘었고 매출액은 1,000만 달러에서 1억8,000만 달러로 18배 이상 늘어난다. 얼마나 빨리 사업이 확장됐던지 80년대까지 10년 동안 마그나 그룹은 새 공장을 평균 8주 만에 하나씩 열었으며 나중에는 5,000종류가 넘는 부품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70년대부터 시작된 인수합병 행진은 최근까지 이어져 지난 98년 오스트리아 150년 전통의 엔진시스템 업체인 스타이어(Steyer)를 인수, 유럽 공략을 본격화했다.

창업가 정신… “남의 돈 무서운 줄 알아야”

하지만, 그가 늘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이런 확장 과정 속에 지나치게 부채를 많이 끌어다 쓴 게 화근이었다. 80년대 말 자동차 산업이 일시적인 위축 국면을 맞았을 때 마그나의 확장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불황도 그의 집념을 꺾지는 못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회사에 재정적 위기가 닥치자 특별관리팀을 구성하고 위기 극복에 매진한다. 비효율적인 조직을 수술하고 비전략 계열사를 과감히 매각하는 구조조정 끝에 결국 91년 말 그는 1억 달러의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데 성공한다. 금융시장에서 마그나의 재기를 인정한 것이다. 이후 매출액, 수익, 그리고 주가는 큰 폭으로 뛰어오르며 새로운 기록 경신에 들어간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마그나는 92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도 상장된다.

그로부터 10년 뒤 고향 오스트리아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때 당시를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후배기업인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돈 무서운 줄 알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창업가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규모를 불리다 회사를 잃어버릴 위기까지 갔던 경험을 한 그로서는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진다고 해서 경영자가 위축돼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들어있다 하겠다.

수중에 단돈 40달러를 들고 50년 만에 억만장자로 자수성가한 그의 ‘부와 기업’에 대한 시각은 공정기업(Fair Enterprise)이란 말에서 잘 나타난다. 지난 97년 <캐나다 경제 기술개발 저널(Economic and Technological Development Journal of Canada)>에 실린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안’에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개인이 두 가지 기본적인 자유를 찾으려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행복으로 가는 길(방법)을 선택하는 자유요, 또 하나는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인 자유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런 자유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자유를 실현하는 길은 자유기업(free enterprise)을 이 땅에 많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유기업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암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유기업이 종업원의 복지와 사회 기여 등 베푸는 일에 주력할 때 이를 비로소 공정한 기업(Fair Enterprise)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사회책임론… 종업원 수익보장, 장학재단까지

그가 주장하는 공정한 기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되 궁극적으로 그 이익을 종업원을 포함한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에 경영의 초점을 맞춘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70년대 시작했던 ‘종업원 수익보장 및 참여제도’가 바로 공정한 기업으로 가는 전제조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종업원들에게 그 성과를 적절히 보장하고 주주들에게는 최대의 배당금을 약속하는 한편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재투자하는 기업이야말로 사회의 부를 확대시키는 공로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취지로 설립한 ‘공정기업 재단(Fair Enterprise Institute)’의 인사말에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공정기업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기업정보는 투명하게 공개하고 종업원들에게 이익과 소유권의 일정부분을 양도하는 것은 물론 대부분의 회사 이익을 사회에 재투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정기업 이론에 포함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스트로나크 회장은 기술자 우대와 종업원 존중 사상을 회사 규정으로 만들었다. 그가 세운 기업이 확장되고 큰 회사를 합병하는 등 성장해 나가면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건전한 노사관계가 기업의 안정적인 발전에 절실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종업원 지주제인 ‘종업원 수익보장 및 참여제도(Employee Profit and Equity Participation)’를 도입한다. 그는 단순히 종업원에게 주식을 나눠줘 주주로 승격시키는 데서 머물지 않고 당기결산할 때 납세전 이익에서 일정 부분을 종업원들에게 나눠주는 제도를 창안했다. 배당금과 이익을 모두 분배하겠다는 취지다. 그것도 결산이 끝난 뒤가 아니라 매 회계연도가 시작할 때 몇 퍼센트를 분배하겠다고 미리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먼저, 주요 간부들에게 이 제도를 실시한 뒤 점차 아래로 확산시켰다. 이후 스트로나크 회장은 마그나의 회사규정인 ‘기업 헌법(Corporate Constitution)’에 이 같은 내용을 명문화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후진 양성에도 주력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95년 100만 달러(약 9억원)를 출자해 설립한 ‘마그나 장학회(Magna for Canada Scholarship Fund)’이다. 이 장학회에서 벌이는 주요 사업 가운데 ‘내가 총리라면 상(As Prime Minister Awards)’이 있다. 캐나다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 경영에 대한 비전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모은다는 취지로 제정된 이 상은 선정방식이 최근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출연해 미국에서 화제를 모은 ‘견습생(Apprentice)’과 비슷하다. 작문심사를 통해 1차로 전국 대학생 가운데 50명의 후보자를 선발한 뒤 10명을 뽑아 각계의 전문가들과 캐나다의 총리 등 정치인 앞에서 자신의 비전을 발표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한 명의 장학생을 선발한다. 두 번째 단계를 통과한 10명의 후보자에게는 마그나 그룹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스트로나크 의장이 후원하는 후진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은 이 외에도 많다. 젊은 창업가들의 모임인 ACE(Advancing Canadian Entrepreneurship)의 주요 자금지원자이기도 하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창업가 정신’을 강조한다. 그 자신이 단돈 40달러를 들고 낯선 땅에 와서 성공한 사람인 만큼 창업가 정신이 더욱 각별할 터이다. 그는 ‘내가 총리라면 상’의 설립 취지에서 창업가 정신과 국가의 미래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주역들, 정부·기업·노조·학계·언론계 등은 서로 협력해 실업률을 낮추고 일자리를 창출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나서야 합니다.

교육은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인재들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국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시킬 때 국가의 앞날도 밝아질 수 있습니다. 이 상은 단순히 지식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이상을 보유한 젊은이를 평생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는 고향 오스트리아에서도 후진 양성을 시작했다. 지난 2001년 2,400만 유로(약 300억원)를 출자, 오는 10월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 안에 그의 이름을 딴 ‘프랭크 스트로나크 공과대(Frank Stronach Institute)’가 개교할 예정이다. 학교측은 “신설되는 단과대학에서는 기술과 경영학을 접목시킨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학생들에게 자동차에 관한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스트로나크 의장은 현재 마그나 그룹 회장으로서 생산현장에서 한 발 물러나 기술과
마케팅, 생산성 향상과 관련된 국제전략 수립을 지휘하고 있으며 중요한 경영상 결정에 조언을 하고 있다. 최근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는 아시아 시장 확대도 그의 구상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그나 그룹 스티브 로저스 부사장은 지난 5월 내한, “동광기연과 합작으로 만든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 ‘DK인테리어’에 올 하반기까지 7,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한편 ‘HAC’에도 5,000만 달러를 투자, 엔진용 오일펌프를 생산하는 등 앞으로 2억2,000만 달러(약 2,600억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제너럴모터스 본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다 지난 8월20일 그룹의 신임 대표이사로 영입된 마크 호간(Mark Hogan) 사장은 “북미에서 영업을 확고하게 굳히는 한편 신흥시장으로 부상하는 한국, 중국, 호주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마그나의 사업을 확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1년 이후 마그나 그룹의 대표이사 자리는 스트로나크 회장의 딸인 벨린다(Belinda)가 맡고 있었으나 지난 1월 연방 보수당 당권 경쟁에 나서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7개월째 공석이었다. 벨린다는 비록 당수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지난 6월 연방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당선돼 지난 88년 정계에 진출하려 했던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었다.

물론 그가 멀리서 원격조정하는 데서만 만족하고 완전히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평생 취미인 승마와 미래의 유망산업이라는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마그나 그룹의 유럽지역본부장을 맡고 있는 그의 아들 앤디(Andy)와 지난 2000년 공동창업한 마그나 엔터테인먼트(Magna Entertainment Corp.)는 1,500필의 말과 1억 달러의 외형으로 경주마 관련업체 가운데서는 북미에서 가장 큰 업체로 성장했다. 이 회사는 또 미국 애틀랜틱 시티 등 북미 여러 도시에서 카지노 사업도 벌이고 있다.

50년 전 단돈 40달러를 들고 캐나다에 도착했던 가난한 오스트리아 청년 프랭크 스트로나크. 그의 창업가 정신은 칠순을 넘기며 펼치는 ‘인생 2막’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출처-비즈넷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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